형세가 시비보다 중요하다

성호사설과 금융시장에서 배우는 운명과 투자의 이치

📌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 한국 가치투자 1세대 이채원 의장, 그리고 경제학자 조순 교수. 서로 다른 시대와 분야의 세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형세가 시비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투자를 위해 회계·재무·경제학의 지식 기반을 쌓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어느 정도 쌓인 이후에는 시장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 관점은 투자 영역 내부에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방면에서 통섭적인 시각으로 독서와 사색을 지속하는 것, 특히 동양의 고전과 역사서가 사고의 깊이를 한 차원 끌어올려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세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그 사례입니다.


🌿 성호 이익의 통찰 — 형세·운·시비의 위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그의 방대한 저술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역사를 읽는 방법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독사요성패(讀史料成敗) — 사서를 읽으면 그 성패를 짐작할 수 있음

천하의 일이 대개 10분의 8~9쯤은 천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서(史書)에 나타난 바로 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이 그 시기의 우연에 따라 많이 나타나게 되고, 심지어 선악과 현불초의 구별까지도 그 실상을 꼭 터득할 수 없다.

옛날 사서를 편력하여 상고하고 모든 서적을 방증(旁證)하여 이리저리 참작하고 비교해 보니, 오로지 한 서적만 믿고서 단정할 수 없겠다. 옛날 정자(程子)는 사서를 읽다가 한 반쯤 이르러서 문득 책을 덮고 한참동안 생각하여 그 성패에 대한 실상을 짐작한 후에야 다시 읽었고, 또 사실이 잘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그 중간에 씌어진 사실이 다행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불행히 실패된 것도 있으니, 대개 그 사실이 맞지 않는 곳이 많을 뿐더러 맞는 곳도 역시 준신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사서란 것은 모두 성패가 이미 결정된 후에 지은 까닭에 그 성패에 따라 곱게 꾸미기도 하고 아주 더럽게도 만들어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또 선(善)에 대해서는 허물을 숨긴 것이 많고, 악(惡)에 대해서는 장점을 꼭 없애버리는 까닭에, 어리석고 슬기로움에 대한 구별과 선과 악에 대한 보복도 상고할 점이 있을 듯하다. 그 당시에 있어서는 묘책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졸렬한 계획도 우연히 들어맞게 되었으며, 선한 중에 악도 있었고 악한 중에 선도 있었다는 것을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천재(千載)나 멀어진 후에 어느 것을 좇아 그 참으로 옳고 그름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사서에 따라 그 성패를 짐작하면 사실과 이치가 그대로 맞는 곳이 많고, 오늘날 목격한 것을 따라 생각하면 10분의 8~9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나의 지혜가 밝지 못해서 그렇게 될 뿐 아니라 바로 천행으로 이루어지는 점을 이용한 것이 많기 때문이며, 또 오늘날에는 일이 이치에 어긋남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옛날 사서도 역시 참[眞]이 어려웠던 때문이다.

나는 이 때문에 천하의 일은 시대를 잘 만나는 것이 최상이고, 행ㆍ불행(幸不幸)은 다음이며, 시비(是非)는 최하로 여긴다.

— 성호 이익, 『성호사설』 중

성호 이익이 말한 세 가지 위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최상
형세
時勢

시대를 잘 만나는 것. 아무리 뛰어난 전략도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면 통하지 않고, 평범한 계획도 시대와 맞으면 성공합니다. 성호는 이것을 천행天行이라 불렀습니다.

중간

幸運

행·불행의 우연. 같은 전략과 같은 형세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결과를 바꿉니다. 묘책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졸렬한 계획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것이 이 층위입니다.

최하
시비
是非

이치의 옳고 그름. 논리적으로 맞는 판단, 이른바 밸류에이션이나 원칙은 중요하지만, 형세와 운 앞에서는 가장 낮은 층위에서 작용합니다. 역사는 옳은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시대를 탄 자가 이겼음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 이채원 의장의 시선 — 금융시장에서의 형세·운·시비

국내 가치투자 1세대인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前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은 한 영상 인터뷰에서 친구를 통해 성호사설의 이 대목을 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고전의 위계 구조가 금융시장의 작동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시비(是非) = 밸류에이션 — 주식의 내재 가치 대비 저평가·고평가를 판단하는 것. 투자의 기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운(幸運) = 예상치 못한 사건 — 주식을 샀는데 9.11 테러가 터진다거나, 리먼 사태가 터지는 것. 반대로 매수 다음 날 호재가 나오는 것. 이것은 진짜 운입니다.

형세(形勢) = 장세의 패러다임 — 성장주 장세인지, 가치주 장세인지. 디플레이션·저금리 시대인지, 인플레이션·고금리 시대인지. 이 흐름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작년에 제 친구가 한번 회사에 놀러와서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님이 쓰신 성호사설인데, 성호사설 이야기를 좀 해주는데, 제가 성호사설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데 대목이 나온대요.

시시비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운세다. 그런데 더 중요한게 있어요. 운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세다.
근데 시시비비라고 하면 밸류에이션이겠죠. 운세는 그 운이란 것은, 정말… 주식을 샀는데 뭐 911 테러가 터진다든지, 리만 사태가 터진다… 이런 건 진짜 운이 나쁜 거잖아요. 또 반대로 운이 좋은 사람들도 있고 그렇죠 마침 샀는데 뭐 그 다음날 호재가 나올 수도 있고,

근데 더 중요한 건 형세라는 거예요. 형세라는게 지금 지난 8년에 이제 성장주 장세잖아요. 그 어떤 가치주도 이렇게 오르는 걸 못 본 것 같고 PER 뭐 2배 3배도 못 올라 갔었잖아요.
그 시절에는 지금은 이제 또 패러다임이… 그로스에서 밸류로 바뀐다 그러면 뭐 성장주도, 좋은 성장주는 오르겠지만… 성장주가 군을 이뤄서 이렇게 마구 오르는 그런 시절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형세가 중요하고, 그 형세가 디플레이션 저금리 시대에서 인플레이션 금리 시대로 가기 때문에 여기에 딱 맞는… 자산가치도 높고 현금도 많이 들고 있고, 좋은 설비를 많이 갖고 있는… 그런 가치주의 시대가 오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 것 들을 이제 무시하고 최근에 트렌드처럼 너무 또 이제 막 테마주나 이런 쪽으로 가다 보면 또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 (인터뷰 중)

이채원 의장이 말하는 핵심은 단순합니다. 아무리 저평가된 주식(시비)을 골라도, 장세의 패러다임(형세)이 맞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순 교수

한국 경제학의 아버지 — 조순 교수님

🌿 조순 교수의 운명관 — 바른 운명을 받는다는 것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자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부총리를 역임한 조순 교수(1928~2022)는 그의 문집에서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겼습니다.

인생에는 운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어떤 신비로운 힘이 나를 인도하여 오늘 여기에 오게 한 것 같고, 앞으로도 그 힘이 나의 여생을 결정할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자기 운명을 개척한다고 하지만 그 자유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어떻게 보면 자유라는 것도 환상같기만 하다.
내가 태어난 것부터 나의 자유의사는 아니었다.

왜 하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는가.
나의 부모라는 특수한 사람들.
왜 나는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녔는가.
경제학은 왜 했는가.
6.25 사변이 아니었던들 내가 군대 가서
육군사관학교 교관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육사 수석 고문관의 통역을 하지 않았던들 미국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밖에 내가 지금까지 한 것, 안 한 것 모두가 겉으로는 나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졌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좋든 싫든 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인도된 결과이다.

왕양명의 시에 “하늘의 판정에 의한 것이지, 사람의 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그는 일세의 대유였고, 난리를 평정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문무겸전의 인물이었지만 그게 다 운명이었다고 본 것이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의 업적을 칭송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분의 엄청난 노력, 결단, 능력, 모두가 신화와 같다.
무엇이 정 회장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가?

Adam Smith에 의하면 정 회장 같은 분의 업적은 ‘자연의 기만(nature’s deceit)’ 의 결과이다.

자연은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을 골라서 여러 가지 욕망을 안겨줌으로써 그에게 힘겨운 업적을 남기도록 유도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노력의 결과를 향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Adam Smith에 의하면 정회장은 자연의 기만에 걸린 분이다.

맹자가 말한 다음 같은 말이 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고 할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어 어지럽게 한다.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모난 성품을 인내로서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 하도록 그 성품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운명을 논하자면 주역을 빼놓을 수 없다.
정이천이 지적한대로 주역에는 네 가지 용도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점을 치는 일이다.
사람의 운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전복위화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주역의 운명관

좋은 운도 잘못 받으면 나쁘게 될 수도 있고, 나쁜 운도 좋게 받으면 좋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기의 운을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세상 모든것이 운명이 아닌 것이 없지만 순하게 그 바른 것을 받아야 한다” 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지나고 보면 운명이 아닌 것이 없지만 운명에는 바른 것이 있고 바르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가운데서 바른 것을 받도록 하라.
바르지 않은 운명을 받은 것은 운명을 아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바른 운명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바른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정말로 바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야 운명을 알고 바른 운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운명을 알아야 세상을 달관할 수 있다.

— 조순, 『조순문집: 이 시대의 희망과 현실 2』 중 ‘운명을 안다는 것’


🌿 세 사람이 말하는 하나의 이치

성호 이익, 이채원 의장, 조순 교수. 서로 다른 시대와 분야에 있었지만, 이 세 사람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형세(시대의 흐름)가 최상이다. 아무리 옳은 판단도 흐름을 역행하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투자에서 이것은 장세의 패러다임을 읽는 것이고, 인생에서 이것은 자신이 처한 시대와 환경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운(예상치 못한 사건)은 중간이다. 좋은 운도 잘못 받으면 나쁘게 되고, 나쁜 운도 바르게 받으면 좋게 된다. 운 자체보다 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시비(옳고 그름, 밸류에이션)는 최하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형세와 운 앞에서 가장 나중에 작용한다는 의미다. 역사는 옳은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시대를 탄 자가 이겼음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바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것. 맹자가 말한 ‘바른 운명을 받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명리학 공부는 대자연과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 이치가 금융시장과 인간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읽어내는 눈을 키우는 것,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고전 속의 지혜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는 것 — 그것이 진정한 통섭적 시각의 출발점입니다.

💡 정말로 바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야 운명을 알고 바른 운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운명을 알아야 세상을 달관할 수 있다.
— 조순

본 칼럼은 고전과 투자철학에 기반한 관점 에세이입니다. 개인별 정확한 분석은 상담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 계동 · 그린리프 휴먼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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